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평가/긍정적 평가 (문단 편집) ==== 식량난 해결 ==== 기본적인 의식주가 대다수에게 보장된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어색한 이야기일수 있겠지만, 예로부터 한반도는 좁은 국토 면적에 토지의 인구부양력을 능가하는 많은 인구가 모여살았기에, 식량 부족에 만성적으로 시달렸고, 매년 찾아오는 [[보릿고개]]는 연례행사와 같은 것이였다. 특히 1950, 1960년대 [[6.25 전쟁]] 이후 많은 사회, 경제적 기반이 파괴된 가운데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증가세에 더해, 일반 서민층들도 밥 세끼 제대로 먹는 것은 사치일 정도로 식량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당시 전국의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만성적으로 들었다는 잔소리가 밖에서 뛰어 놀면 배가 금방꺼져서 배고파지니, 적당히 뛰어놀라는 이야기였을 정도에, 부족한 주곡을 절약위해서 미국의 원조에 따른 밀가루 소비를 촉진시키는 혼분식 장려 운동이 펼쳐졌고, 당시 국민학교 도시락에 분식(粉食)이 없으면 체벌을 받는것이 일상적인 모습이였으며, 국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도 60년대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 기간 동안 꾸준하게 펼쳐진 다수확 신품종 개발, 농업기계화 사업, 이중곡가정책 등 여러가지 식량증산정책의 일환으로 양곡 수확량은 1970년대 들어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결국 1970년대 중반쯤에 접어들면서 [[보릿고개]]로 대표되던 식량난에 따른 굶주림의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박정희시대를 겪은 노인들 대다수가 추앙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긋지긋하던 보릿고개가 사라졌다'고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집권 초부터 민생문제와 농정부문의 최우선 과제로 식량자급을 위한 양곡 증산을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하여 제3차 농업증산5개년계획(1962~1966년)과 이를 수정한 식량증산 7개년계획(1965~1971년)이 수립되었으며, 주요 시책으로서 농지확대를 위한 개간․간척사업과 생산기반정비를 위한 경지정리․관배수 사업, 농업생산성 증대를 위한 연구․지도․보급 사업 등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60년대 초 이러한 계획기간 동안 박정희 정부의 식량자급정책은 양곡의 생산 증가율은 오히려 3.5% 감소하면서 실패로 끝났는데, 그 주된 이유로는, 자연재해나 기상조건의 악영향으로 인한 흉작도 주요 원인이었지만, 농업의 사회적간접자본과 부재재원, 비료, 농약, 농기계 등의 농업생산기반의 부재와 후진성과 같이 당시 농업 기반의 현대보다 조선시대에 가까울 정도로 후진적인 까닭도 매우 상당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중후반부터 이러한 문제를 타계하고, 주곡의 생산과정과 농업 인프라의 근대화를 위해 여러가지 농업진흥책을 실시하였고, 1967년부터 양수기 및 동력분무기 공급을 중심으로 현대적 농업기계화가 추진되어 많은 수의 동력농기계를 농촌에 공급하였고, 이후 70년대에는 1972년 수립된 농업기계화 5개년계획에 따라 상당 부분 농업기계화가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 호미나 쟁기같은 농기구와 우경으로 대표되던 옛 재래식 농업에서 경운기, 트랙터, 이앙기같은 농기계로 대표되는 현대적 기계식 농업으로 진전이 상당 부분 이루어지며, 단위 면적당 재배하는데 필요 인력이 대폭 감소하였다. 이렇듯 70년대 성공적으로 농업기계화 사업 추진되자, 박정희 정부는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농업기계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1978년「농업기계화 촉진법」[*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8703|#]] 참고.] 을 제정하였고, 이는 향후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농업기계화가 이루어지는데 큰 힘이 된다. 이외에도 4대강 유역 개발 사업과 토지개량사업으로 빈약한 농업 사회적간접자본의 부재를 해소하였고, 작물의 재배기술면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으며,[* [[https://theme.archives.go.kr/next/foodProduct/cultivationTechniques.do|#]].] 정부가 주곡을 가격을 시장가치보다 고평가시켜 매입하는 양곡 2중 가격제로 [* 우선 식량의 생산, 유통을 정부가 독점하여 관리하는 양곡관리제 내에서, 증산량과 농가소득을 늘리기 위해 정부가 쌀을 시장가격보다 높게 구매하는 고미가정책과 맥류의 증산과 소비촉진을 위해 보리의 방출가격을 매입가격보다 낮게 하는 출하하는 일종의 표풀리즘성 정책이였다. 이중곡가정책은 보리와 쌀의 소비자가격을 낮춤으로써 소비 촉진과 농촌의 사정이 나아지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정부의 재정 부담은 막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 식량이 만성적으로 부족했던 보릿고개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이중곡가제 실시는 농가소득증대, 소비자가계보호, 물가안정이라는 식량자급을 위해서 필수적이였던 정책 목표를 단기가내에 달성되는데 기여하며, 향후 보릿고개에 벗어날수있는 토데를 마련하였다.] 물가와 농촌사정이 상당 부분 완환된것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릿고개]]를 결정적으로 완벽히 퇴치한것은 무엇보다도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의 역할이 결정적이였다. 1971년 개발된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는, 보통 벼는 이삭당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나 되었으며, 통일벼는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로, 1970년대 동안 널리 재배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속에서 식량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1974년에는 쌀 3,000만석 시대를 열었고, 1976년에는 식량자급을 달성하며, 1977년에는 4,000만 석을 돌파하며 100% 이상 초과치의 주곡 자급을 달성해, 불과 10년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쌀 막걸리가 시판되었고, 체제경쟁의 일환으로 대북 쌀 지원 가능하게하며, 이 시기 대한민국은 완벽하게 보릿고개에서 탈피하였다. 이후 78~80년에는 냉해에 따른 노풍벼 사태로 최고치를 찍었던 1977년 기준 생산량의 70% 수준으로 떨어지며 다시 쌀을 수입하지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바뀌었지만, 60~70년대를 걸쳐 진일보한 농업인프라와 급격히 성장해가는 경제와 국민소득에 따라 이전과 같은 보릿고개는 사라졌으며, 1981년부터는 통일벼를 개량한 신품종이 속속 개발되어 보급됨으로써 다시 매년 풍작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만 80년대 후반~90년대에 들어서면 나날히 늘어가는 쌀 생산량으로 쌀은 남아돌 지경에 이르렀고, 소비자기호가 찰기가 있고 밥맛이 좋은 자포니카종 일반벼를 선호함에 따라 결국 60, 70년대의 "질보다 양" 대신 "양보다 질"로서 변화되면서 70년대 쌀 자급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통일벼와 통일형벼는 점차 사라졌고, 현재 밥상에서 당시 노인들의 일종의 추억거리 이상의 위상을 갖지 못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